천년의 색, 쪽빛을 물들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정관채씨(65) 천연 쪽염색 전통 되살리는 장인

“푸른색은 쪽(藍)에서 얻었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로 인해 이루어졌으나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荀子)의 사상을 집록한 《순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말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하는 '청출어람'이 여기에서 나왔다.

▲ 전수교육생들의 염색 작품을 빨래줄에 말리고 있다. 

쪽빛은 ‘쪽빛 하늘’이나 ‘쪽빛 바다’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다. 쪽빛은 그러나 단순한 푸른색이 아니다. 보랏빛이나 붉은빛이 도는 짙푸른 빛이다. 쪽은 쌍떡잎식물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이다. 줄기는 높이가 50-60cm이며,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이다. 열매는 세모난 달걀 모양이고 길이가 2mm 정도이며, 검은빛이 도는 갈색이다. 잎은 인디고(남색)를 지니고 있다.

▲ 국가무형문화재 염색장 정관채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115호 염색장 정관채 선생(65)은 쪽빛 빚는 일을 지난 47년간 지속해온 쪽염색 장인이다. 쪽을 심고 한여름에 수확해 쪽물을 만들고, 발효과정을 거쳐 쪽빛을 내기까지 육체적으로 고단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과정을 거치며 거의 반평생을 천착해왔다. 

▲ 옹기에 물을 채우고 쪽풀을 넣어 우린다.

쪽빛을 얻는 과정은 쪽 나물에서 시작한다. 4월에 쪽풀을 파종해, 꽃 피기 전인 6월과 8월 사이 한여름에 수확한다. 한여름 폭염 속에서 쪽밭과 전수교육관 마당 옹기 사이를 오가며 진땀을 빼야 한다.

다 자란 쪽대를 수확해 물에 이틀 정도 담가 우린다. 쪽대를 건져내고, 우린 녹색 물에 굴이나 조개껍데기를 구워 빻은 가루를 넣어 침전시키면 쪽염색 원료인 니람(泥藍)을 만들고, 여기에 잿물을 넣어 발효시킨다. 한 달 정도 지나 하얀곰팡이가 수면에 뜨면 쪽 염료가 완성되는 것이다.

완성된 쪽물을 휘저어주면 쑥색에서 다양한 색 변화를 거쳐 특유의 푸른 쪽빛이 나타난다. 결코 화학염료에서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색이다.   

운명처럼 다가온 쪽

정관채 선생은 이 일을 스스로 “운명이다”고 말한다. 전수관이 있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정가마을은 영산강변으로, 예로부터 홍수가 잦은 마을. 장마가 지고 홍수가 나면 살아있는 작물은 쪽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마을 일대에서는 쪽이 주 작물이 됐다. 부모가 3대째 쪽염색을 해왔으나 한국전쟁을 지나고,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화학염료에 밀려 쪽 염색 전통이 거의 끊겨버린 상태였다.

그는 그러나 목포대학 미술학과 1학년때인 1978년 그야말로 ‘운명처럼’ 쪽을 만난다. 은사(박복규 교수)께서 자신에게 쪽씨를 건넨 것이다. “아마도 저를 통해서 과거에 쪽을 심고 쪽 염색을 했던 전통이 빨리 재현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쪽 염색이 너무 힘들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 미술 전공자로서 내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소명감이 들더라고요. 이 일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쪽빛 색깔이 영원히 사라지겠다는 어떤 위기의식 같은 게 느껴졌죠.” 그래서 힘들게 쪽염색 일을 해오신 부모들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오로지 소명감과 책임감으로 50년 가까이 쪽 염색에 천착하고 있다.

▲ 전수교육관 입구

쪽씨를 만난 지 23년째 되던 지난 2001년 정관채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쪽풀을 베다 손마디가 잘리고, 한때 독성 폐기물을 내버린다는 소문에 시달리는 등 숱한 고비를 넘기고서다. 당시 중요무형문화재로는 최연소였다. “태어난 것도, 대학에서 쪽씨를 건네받은 것도 모두 운명적인 것이었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소명의식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죠.”

쪽염색의 미래를 위하여...

▲ 전수교육생들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정관채 선생은 쪽염색이 전통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길 바란다. 지난 2022년 덴마크 가구명가 ‘프리츠한센’ 창립 150년 기념전에 협업작업을 진행했다. 정 염색장이 만든 쪽빛 무명천으로 덴마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의 걸작 ‘에그(Egg)’를 감싸 ‘쪽빛 의자’로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품을 완성한 것이 가능성을 확인한 하나의 단초라면 단초였다.

선생은 쪽염색의 세계화를 꿈꾸며 주말마다 후학 양성에 헌신하고 있다. 요즘에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에서도 쪽염색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에코산업이 하나의 트렌드로 확산되면서 쪽 염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매주 주말마다 운영하는 무료 교육에는 두 과정에 모두 40명이 넘는 후학들이 기능을 전수받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금까지 전통을 되살리고 발전시켜 온 것이 제몫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문화양식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닦는 일이 중요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염색을 배우고 익혀 새로운 문화로 정착시켜 확산시켜 나가는 일을 해야 하고, 이것이 후학을 양성하는 이유입니다.”

나주 새골은 예전에 목화를 많이 심어 천 짜는 마을이었다. 목화는 고온다습한 지역에서 나는데 이 일대가 적합한 곳이었다.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는 무명짜기 기능, 즉 ‘새골나이’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지역이 무명과 쪽이 만나 쪽염색의 고장이 된 셈이다, 특히 쪽은 천연 모시나 삼베, 한산모시, 비단과 같은 천연 섬유와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 전시장에 전시된 다양하게 디자인한 생활용품들.

천연섬유에 쪽염색한 천은 항균•항염•방충효과가 탁월하다. 그래서 배냇저고리나 의류, 침구류 등에 쪽염색이 쓰인다. 화학섬유나 화학염료 등이 보편화될수록, 인간과 자연에게 이로운 천연섬유와 천연염색의 가치가 커지고 있으니 염색장의 소망이 더더욱 커지는 연유다.

정관채 염색장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돼 있는 청바지를 쪽염색한 명품 쪽청바지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천연염색한 쪽청바지는 화학염색한 청바지에 비해 환경오염도 줄이고 건강에도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다. 또 가죽을 쪽염색하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

정 염색장 옆에는 함께 생활하며 작업하는 가족이 든든한 동료가 돼 함께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일손을 거들어온 부인 이희자씨는 쪽염색 과정을 모두 마스터해 ‘이수자’가 됐다. 이씨는 천연염색과 함께 바느질 솜씨도 좋아 염색과 바느질을 융합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또 둘째 아들 찬희씨가 전남대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 있다. 전통 천연염색 옷감에 현대적 디자인을 입혀 대중적인 생활용품을 만드는 새로운 도전도 하고 있다. 현재 ‘우수 이수자’이기도 하다.

▲ 전시장 전경.

전수교육관에는 조그마한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여기에는 쪽염색한 각종 생활용품과 함께 쪽염색 병풍, 종이에 색깔을 입혀 불경을 새긴뒤 금으로 도금한 금니사경(金泥寫經), 내부를 쪽염색한 한지로 마감한 함지, 쪽염색한 기러기, 밀랍을 녹여 쪽염색한 뒤 꽃을 만든 윤회매(벌이 오는 꽃) 등 작품들이 다채롭게 전시돼 있다.

▲ 쪽염색 병풍

▲ 금니사경

▲ 윤회매

“결코 화학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자연의 색, 천년의 색인 쪽빛을 전통으로만 남겨둬서는 안 됩니다. 쪽색은 햇빛과 바람, 공기와 같은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나오는 색입니다. 고단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색을 빚어내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확산되는 날까지 소명감으로 이 일을 완수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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