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종자를 찾아다니다
남동양반은 20대 후반, 전남 일대에서 마을에 들어가 소위 ‘마을살이’를 하며 농사를 짓고, 종자를 수집하며 5년여 세월을 보냈다. 장흥은 물론 강진, 장성, 화순 등지를 돌아다니며 지냈다. 종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도둑으로 오해도 받고, 사람들의 의심에 찬 눈초리도 받고,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종자 수집에 몰두했다.
그렇게 수집한 토종 씨앗들을 하나씩 늘려가며, 자신의 고향인 전남 장흥 운주마을에 농장을 마련하고, 손수 농사를 짓고 종자를 채집해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렇게 40년 이상을 하다보니 어느새 그에게는 현재 27개 작목 150여종의 토종 종자가 남겨졌다. 벼 종자는 30여종, 콩 종자는 무려 50종에 이른다.
20대에 부모님의 경제적 문제로 고초를 겪고, 2년여 방황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보관해 둔 씨앗이 모두 못쓰게 된 것을 발견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어머니의 유산을 망쳐놨다는 자책감이 컸죠. 다시 찾아야겠다는 의지도 생겼고요.” 그때부터 토종 종자를 찾아 산골짜기를 비롯해, 토종 종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다니게 됐다.
토종 농사는 생명을 지키고, 추억과 보람을 남겨...
남동양반은 토종 종자로 농사짓는 게 추억도 되고 보람도 있단다. 우선 토종 종자는 현지 토양과 기후 등에 적응이 잘 돼 있어 병충해에 강하단다. 무엇보다 토종 종자로 농사를 지으면, 생산된 작물에서 종자를 자가 채종해 다음해에도 종자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굳이 종자를 사서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토종 농사를 짓다 보면 이야기가 생겨요. 어머니와 밭에 종자를 심고, 김을 매고, 커가는 것을 지켜보던 이야기들, 잘 자란 참외를 냇가에서 함께 깨 먹고, 계곡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들었던 추억이 깃들어 있습니다.”
토종 작물은 옛날 농사법이 제격이란다. 벌과 나비가 만들고, 바람과 비가 키워주는 소위 ‘자연이 짓는 농사’라는 것이다. 화학비료나 농약과 같은 인위적인 간섭이 크게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계나 화학약품 대신 농부의 땀이 좀더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유전자조작과 화학비료와 농약 등 화학약품이 기본이 된 오늘날 농사와는 토종 농사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토종농사는 자연에 의존하는 농사인데, 대규모로 농사짓기도 힘들고, 또 모양이나 생산량이 시장의 요구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통이 힘들다. 그래서 소규모 농사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반면, 건강한 먹거리, 사람에게 이로운 작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씨앗 따라 돈이 돌아야지, 돈 따라 씨앗이 결정되면 되나요?"
종자는 한 번 없어지면 다시 살릴 수가 없다. 토종 종자는 지속적으로 재생산이 가능하고, 기후와 토양에 적응해와 병충해도 강하다. 또 다양한 종류만큼 맛도 색감도 다양하다. 예전에는 시골이나 산골마다 다양한 종자들이 존재했으나 최근에는 점점 획일화돼 가고 있어 안타깝다.
결국에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 종자도 단순화되고, 또 그 종자마저 농부들의 손이 아니라, 대규모 종자회사의 손에 달려 있게 됐다. 그만큼 소비자들의 선택 폭이 줄게 되고, 소비자들의 입맛마저 단일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씨앗보존농사로 씨앗 전파
남동양반은 몇 해 전 장흥시장에서 앉은뱅이강낭콩을 꼬투리째 갖고 나와 계신 할머니에게 콩을 한 줌 샀다. 자신에게 없는 종자여서 종자에 쓴다면서 한 줌 사서 돈을 드렸더니 할머니께서 “종자 할려면 너무 적다”면서 몇 줌 더 주시면서 돈을 절대 받지 않으셨단다. 그래서 “종자는 파는 게 아니고 나누는 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됐단다.
남동양반은 시장에 내다파는 농사가 아니라 씨앗을 보존하기 위한 씨앗보존농사를 짓는다. 자가소비용 농사는 따로 조금씩 짓는다. 젊은 시절부터 자식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려 하니 씨앗농사로는 돈이 안 된다. 그래서 자가소비용 농사와 함께 택한 것이 막노동이다. 손재주가 좋아 비닐하우스나 보일러 시공은 물론, 심지어 용접일까지 농촌지역에서 일손이 필요한 곳에는 가리지 않고 참여해 생계비를 벌어들이고 있다.
그가 하는 농사는 말 그대로 씨앗보존농사다. 토종 씨앗은 말려서 보관하더라도 2-3년이 지나면 발아를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종류별로 종자들을 매년, 최소한 2년 이내에 다시 심어 거두고 말려 보관하기를 반복한다.
“씨앗은 파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잠깐 보관하는 것입니다. 잘 보관했다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죠. 씨앗을 가져간 사람이 잘 사용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겠죠.”
그래서 그는 토장 종자 나눔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은 장흥에 귀농한 농가들이 함께 '남도 토종종자 나눔회'라고 해서 토종씨앗 나눔을 하고 있다. 토종 농가 19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종자 보급과 교육으로 지식과 지혜를 나누다
몇 해전부터 딸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배워 지금은 자신의 얘기를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종자도 종자지만 종자를 올바로 알맞게 사용하는 지식과 지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자립농사 토종이 대안이다’는 주제로 '토종이야기'라는 자료집을 정리했다. 책으로 발간하지는 않았지만,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인쇄본으로 제공한다.
요즘 남동양반은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토종종자 얘기를 들려주고 다니는 일로 분주하다. 또 토종 종자를 가져간 사람들이 농사법을 묻는 경우도 많아 그때그때 현장을 찾아가 지식과 지혜를 나누고 있다.
종자 보전의 계승을 기대하며...
남동양반은 슬하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딸들이 결혼하고 다들 잘 살고 있고, 아들은 농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단다. 아버지의 일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나름 개복숭아나 머루, 다래와 같은 토종 과수에 관심을 갖고 농사를 짓고 있다. 혹여 자신의 평생 과업을 이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있단다.
“젊은 세대는 우리 세대와는 다르죠. 같이 해보려 하지만 하는 방식이 달라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젊은 애들이 하는 게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방식을 존중하고 지지하려고요.”
또 오는 10월 자신의 고향인 장흥 용반마을과 운주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년제를 지낸다. 거기에 마을주민들의 요청으로 토종 수수와 조, 벼 등을 제공할 예정이다. 옛날 방식의 떡과 음식을 만들어 마을 잔치를 벌일 계획이란다. 뭔지 모르지만 가슴 속에 또다른 열정이 생기고, 어떤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것 같아 뿌듯하다.
“우선 농사가 즐겁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지켜왔던 토종 종자로 자연에 맞춰 농사를 지어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다면 좋죠. 제가 그 종자를 계속 지키고 보존하면서 나눠주니 그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토종 종자로 건강한 먹거리를 식탁에 올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 ‘남동양반’은 씨앗농부 본인이 원하는 호칭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 사진이 기사에 등장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며, 호칭만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따라서 본고는 본인의 요청을 존중해 ‘남동양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