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와 정지 장군, 정가신 배출, 그들이 남긴 유산을 품다

금안한글마을 : 호남 3대 명촌, 역사문화가 살아있는 문화마을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금안한글마을은 호남 3대 명촌 중 하나다. 영암 구림마을과 정읍 무성마을이 나머지 둘이다.

금안마을은 학문과 풍류를 나누던 쌍계정과 선조를 기리는 서원들, 한글 창제의 주역 신숙주 생가, 정지장군을 기리는 경열사 등 역사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역사의 숨결이 온전히 살아숨쉬고 있다.

마을 안길은 돌담길로 잘 정비돼 아름답다. 마을 여기저기를 찬찬히 돌아보면 역사문화를 온전히 음미해 볼 수 있는 장소들이 연이어 나타나는 역사문화마을이다.

금안한글마을 내력



금안마을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숲이 우거진 새들의 낙원’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금안동(禽安洞)으로 불리었다. 고려 말에는 음을 그대로 두고 뜻만 ‘금으로 만든 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뜻으로 ‘금안동(金鞍洞)’으로 불렀다고 금성읍지(1897년)에 전한다. 고려말 충렬왕 때 원나라 사신으로 파견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설재 정가신 선생이 금으로 만든 말안장을 가져온 동네라는 내력이 담겨 있다.

▲ 마을 입구에 세워진 4대 성씨의 내력을 담은 표지석.

금안마을은 4개 성씨 집성촌이다. 풍산 홍씨와 서흥 김씨, 하동 정씨, 나주 정씨 등 네 가문이다.

풍산 홍씨는 조선 정조때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몽한과 문신 홍국영이 자손들이다. 금안동에 자리잡은 것은 7세손 수(樹)로, 홍씨 집안은 월정서원과 서륜당, 석류문(효자비) 등의 유산을 남겼다.

서흥 김씨가 호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훤당 김굉필의 숙부인 총이 1454년 영암에 정착하면서다. 금안동 서흥 김씨는 총의 후손들로, 장손자인 감을 금안동 풍산 홍씨의 사위로 들여 금안동에 살게 했다. 김씨 집안은 경현서원과 영수각, 만향정, 어서각 등을 유산으로 남겼다.

하동 정씨는 금안동 가계인 도정계로, 나주와 인연은 금성군에 봉해졌던 성(盛)대로 보인다. 손자 지는 여러 번 왜구를 물리쳤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뜻을 같이하는 등 무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지 장군의 증손 서가 금안동으로 옮겨와 일가를 이뤘다. 문화유산으로 경열사와 효사재를 남겼다.

나주 정씨는 중시조를 문정공 설재 정가신(鄭可臣, 1224-1298)로 삼는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에서 출생, 금안동에서 자랐다. 고려 충렬왕때 세자(훗날 충선왕)의 스승으로, 원나라행을 수행 중 원나라 성종은 하남행성 좌승사 관직을 임명하려 했으나 사향시(思鄕詩)를 올려 사양했다.

海東南有錦城山(해동남유금성산) 고려국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山下吾廬草數間(산하오려초수간) 그 산 아래 내가 살던 초가삼간 있네
巷柳園桃親手種(항유원도친수종) 마을 골목과 뒤안에 내가 친히 심은 버드나무와 복숭아는
春來應待主人還(춘래응대주인환) 봄이 오면 응당 주인 오기를 기다리겠지

이 시를 읽은 원나라 성종은 정가신의 고려 환국을 허락했다 한다. 금으로 만든 말 안장과 금으로 만든 허리띠, 백마, 용이 그려진 벼루를 선물했다 한다. 나주 정씨는 유산으로 설재서원, 쌍계정, 오산사, 귀래정, 수우지정 등을 남겼다.

▲ 아름다운 마을 안길.

신숙주와 정가신, 정지 장군으로 대표되는 역사 인물의 고장

▲ 신숙주 생가에 내걸린 신숙주 초상화.

금안마을에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한글 창제의 주역인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년) 선생의 생가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신숙주는 외갓집이었던 당시 오룡동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과 진사시에 동시 합격, 이듬해 친시문과 급제 등을 이뤘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 응교, 직제학과 사헌부 장령, 집의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42년에 훈련원 주부가 되면서 ‘서장관’이란 직책으로 일본 통신사를 다녀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에 착수했다. 1446년 9월에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하게 됐다.

현재 그의 생가터는 가계도와 보한재 영정(보물 제613호)이 걸린 채 보전돼 있고, 작은 앞마당에 포도나무 등 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다. 

정가신과 쌍계정

문정공 정가신은 고려 충렬왕때 문장가이자 정치가로, 왕들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고종 30년(1243년) 20살에 국자감 시험해 합격하고 32살 때 대과에 급제한다. 그후 충렬왕 3년에 경연과 장서를 맡아보던 보문각의 최고수장인 정5품 보문각대제가 된다. 1290년에는 정당문학, 즉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된다. 지금의 금안동 한자 이름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은 잘 알려져 있고, 그가 쌍계정을 세웠다.  


쌍계정은 정가신이 김주정, 윤보와 더불어 학문과 인격을 갈고닦은 장소. 그래서 ‘삼헌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뒤 조선 세조때 정서, 신숙주, 김건, 홍천경 등 당대 대표적 학자들이 학문연구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쌍계정은 또한 마을 규약을 정해 미풍양속을 실현하는 향약을 논하던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마을을 이루고 있는 4개 문중에서 대동계를 하며 쌍계정을 공동관리하고 있다. 금안마을에는 동계 관련 소장 문서가 51점이나 남아 있다.

▲ 한석봉이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진 쌍계정 현판.

쌍계정 현판은 명필 한호(韓濩), 한석봉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쌍계정 앞뒤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한 그루씩 우람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정지장군 모신 경열사


마을 입구에서 마을 안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경열사가 나온다. 경열사는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경열공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원래 광주 동명동에 있던 것을 조선 고종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부숴 없앴던 것을 1914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웠다.

정지 장군은 우왕 3년(1377년) 여름, 왜국가 순천•낙안 등지를 침략하자 예의판서로서 순천도병마사가 돼 적을 격파하는 등 왜국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역모를 꽤했다는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게 되고, 광주에서 살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이 장군의 공을 기리며 경열사를 세웠다.

금안마을의 서원들

금안마을에는 월정서원, 설재서원, 경현서원 등 3대 서원이 남아 있다.

▲ 월정서원 전경.

월정서원(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6호)은 박순, 김계휘, 심의겸, 정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60년 복원됐다. 사당과 강당,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구성돼 있고, 경내에는 월정서원유허비, 월정서원묘정비 등이 있다.

경현서원과 함께 16-17세기 나주지역 선비들의 활동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1659년(효종 10년) 나주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의 학덕을 흠모하던 유림들의 상소로 건립됐다.

▲ 설재서원 중문과 거북이 비석.


설재서원(전남도 문화재자료 제93호)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숙종 14년 최초로 창건했다. 이곳 역시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00년 영모재를 복원해 제향하던 중 1953년 재건됐다. 

▲설재서원 후원 700년 된 비자나무

설재서원 후원 비자나무는 오랜 풍상과 수차례 화재를 겪으면서도 우람하게 자랐으며, 나주 정씨가 금안동으로 입촌한 1280년대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 차례 홍수에도 설재서원 훼손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 후손들은 비자나무가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설재서원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0여m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우람한 자태가 드러난다.

한편, 경현서원은 김굉필(1454-1504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83년 창건돼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같은 선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됐다 1977년 전남지역 유림들에 의해 복원됐다. 나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 서륜당 외관.

서륜당은 풍산 홍씨 문중에서 1590년에 건립한 제각. 정면 4칸 팔각지붕 구조다. 홍씨 문중회의와 매년 음력 정월 초이틀에 근동에 있는 일가들이 모여 합동세배를 400여년간 이어오고 있다. 문간채는 1945년 중수했고, 서륜당 표지석은 2011년 12월 1일 세웠다.

석류문과 척서정, 비석과 회각 등 즐비

이밖에 금안마을에는 마을별로 각 성씨들의 제가 및 회각 등이 모두 6개소가 있다. 석류문은 선(善)을 내려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시경’에 ‘효자가 끊이지 않으니 길이 선을 내려주리라’는 뜻을 갖는 곳이다.

또 1915년 경남 하동사람 척서 정해일이 세운 척서정도 있다. 경열사가 금안동에 복원될 때 함께 세웠다. 단층의 팔각지붕 평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건물이다.

▲ 한편, 마을 한켠, 금성산 생태탐방로 입구에는 옛날 과거 합격자들의 명단을 발표하던 고방터 팻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한글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한옥건물 2채.

한편, 금안마을에서는 방학을 이용해 3박4일간 전통문화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예절과 인성, 한문, 한글, 전통교육 등은 물론 각종 제사와 관혼상제 등 전통문화를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체험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마을 문화재 및 옛 선비길 탐방 등을 통해 옛것을 보존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마련했다.

주변 관광지

금안한글마을 뒤편으로 나주 금성산 생태숲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잘 갖춰져 있다. 마을 안길을 지나 숲 입구에는 금성산 생태관이 2층 규모로 세워져 생태숲을 미리 알아볼 수 있는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 마을 외곽에는 금성산 자락에 한옥행복마을과 남천예술인마을 등이 있어 아름다운 마을 경관과 함께 예술인들의 다양한 활동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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