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 개예 안ᄀᆡ 것고 뒷 뫼희 ᄒᆡ 비췬다 (앞 포구에 안개 걷히고 뒷산에 해 비친다)
ᄇᆡ ᄠᅥ라 ᄇᆡ ᄠᅥ라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낫믈이 미러 온다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지국총(至匊悤) 지국총(至匊悤) 어ᄉᆞ와(於思臥) (지구총 지국총 어여차)
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빗치 더옥 됴타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으로 더욱 좋다)
고산은 42세가 되던 162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이조판서 장유의 천거로 인조의 자손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됐다. 5년 동안 요직을 거치면서 사부를 겸임했다. 봉림대군은 12세부터 17세까지 고산에게 학문을 배웠다.
효종으로 즉위한 봉림대군은 등극하고 두 해가 지나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에게 벼슬을 내렸다. 병으로 취임하지 않았으나, 왕이 다시 불러 조정에 나아갔으나 이번에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효종은 사부인 고산께서 멀리 해남에 가게 되면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고 왕의 과실을 충고 보좌하기 어렵다 하여 한양에서 가까운 화성(수원)에 집을 지어 주고 살도록 했다고 알려졌다.
윤효정은 스물여섯살 때인 1501년 성균관 생원에 합격하지만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농업과 자손 교육에 힘쓰며 살아간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를 하면서 살겠다는 어초은(漁樵隱 )이라는 호가 도가적 취향을 말해준다.
윤효정은 특히 자손들의 바람직한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성리학의 실천적 사고와 전통 풍수사상에 맞추어 백련지를 꾸미고 원림을 조성했다고 한다. 특히 덕음산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위치에 ‘심(心)’자 연못을 조성하고 연못에는 백련을 심었다.
안채 뒤 담장 밖에는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어초은 사당은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윤효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간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또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고택 앞에 서 있는 늙은 은행나무에 바람이 불면 잎이 비처럼 떨어진다고 해 유래한 것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어쨌든 녹우는 보통 4월 20일 전후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풀과 나무가 푸를 때 내리는 비를 말한다. 푸르다는 것은 사대부의 지조나 절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녹우당은 사계절 푸른 원림이나 사대부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비유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였다. 표현 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을 다수 남겼다.
현재 입장권 매표소로 운영되고 있는 곳은 원래 서당자리였다. 주변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곤궁한 마을 아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던 서당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서당도 제 기능을 잃고 하면서 지금은 매표소로 운영되고 있다.